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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너절한 일상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섬광들을 포착”해 냄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들에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서영채/문학평론가)을 알렸던 소설가 이평재의 두 번째 소설집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선하다. 작가는 첫 번째 소설집에서 보여주었던 “질척거리는 점액질의 세계 저편에 펼쳐진 한없이 막막한 공간”(남진우/문학평론가)을 좀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언어로 그려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제로 “그려”냄으로써 그 상상력을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작품마다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가 3컷씩 들어 있다. 총 24컷의 그림은 각각 구상 수채화, 추상화, 일러스트, 만화 등 다양한 스타일로 그려져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이평재의 이 그림들을 보면 그의 소설 세계가 보여주는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보다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눈앞에 다가오며, 동시에 그 상상력이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표제작인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는 35,000년 된 크로마뇽인 유령과 만난 후로 성기가 작아지는 증세에 시달리는 형사의 이야기다. 인질범 설득을 전문으로 하는 형사인 ‘나’는 매우 비정하고 여자에 대해 비하적인 감정을 품고 있으며, “사랑은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비틀린 인물이다. 수많은 여자와 섹스를 하지만 그 여자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경멸하고 있는 ‘나’에게는 ‘아내의 외도와 이혼’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다. 주인공이 여성을 ‘구멍’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게 된 데에는 아내의 불륜이라는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를 긍정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냉혹성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 앞에 나타난 크로마뇽인 유령은 바로 주인공의 결핍되고 비틀린 욕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확대경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점점 작아져서 자신의 성기가 있던 자리(구멍)로 빨려 들려가 사라져버리는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일상적 삶을 살고 있는 존재에게 어느 날 문득 벌어지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사건, 그로 인해 와해되고 붕괴되는 현존의 허약함, 그리고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의 섬뜩함. 이것은 이평재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인데, 두 번째 수록작인 「고양이 변주곡」은 이런 특징이 매우 잘 짜인 구조다. 부유한 가정주부인 ‘케이의 아내’는 어느 날 밤, 남편 ‘케이’가 시어머니의 방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고 시어머니가 남편의 성기를 만져주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충격에 휩싸인 ‘케이의 아내’는 고민 끝에 시어머니를 위해 어루만질 수 있는 고양이를 데려다주지만, 케이와 시어머니의 변태 행각은 계속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케이의 아내’는 시어머니의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죽은 고양이로 요리를 만들어 남편에게 먹인다.
하지만 엽기적이고 기괴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케이의 아내’는 계속해서 시어머니의 고양이를 죽이는데, 이 과정에서 외음부 무모증 콤플렉스가 있었던 ‘케이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성적으로 혐오해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케이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환영과 악몽에 시달려 급기야 가정은 붕괴의 지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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